카드론 잔액이 사상 처음 43조원을 넘어섰다. 은행에서 필요한 돈을 빌리지 못한 가계가 카드사로 이동하면서 고금리 대출 수요가 빠르게 늘어난 결과다. 일반적으로 대출이 늘면 금융회사의 이자수익도 증가하지만 카드사들의 전체 수익성은 오히려 악화됐다. 카드론이 증가해도 카드사가 예전만큼 돈을 벌기 어려운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여신금융협회에 따르면 국내 9개 카드사의 2026년 5월 말 카드론 잔액은 43조2,543억원으로 한 달 전보다 2,704억원 증가했다. 올해 1월부터 3월까지 연속 증가한 뒤 4월 잠시 줄었지만 5월 다시 늘어나며 역대 최대 기록을 경신했다.
카드론을 갚기 위해 다시 카드사에서 돈을 빌리는 대환대출 잔액도 4월 말 1조5,983억원에서 5월 말 1조6,559억원으로 늘었다. 신규 생활자금 수요뿐 아니라 기존 대출을 정상적으로 상환하기 어려운 차주도 많아지고 있다는 신호다. 카드론 급증의 가장 큰 원인은 은행권의 가계대출 관리 강화다. 은행이 신용대출 한도와 심사를 강화하면 신용점수가 낮거나 소득 증명이 어려운 사람은 제2금융권을 찾게 된다. 카드론은 별도의 담보 없이 비교적 빠르게 이용할 수 있어 생활비나 사업자금이 급한 사람들에게 사실상 마지막 대출 창구가 되기도 한다.
물가와 주거비, 교육비 등 필수지출이 증가하면서 가계의 여유 자금이 줄어든 점도 영향을 미쳤다. 소득 증가 속도보다 생활비가 빠르게 오르면 부족한 돈을 대출로 채우게 된다. 은행에서 대출받기 어려워진 가계의 자금 수요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금리의 카드론으로 옮겨간 것이다. 카드론은 은행 신용대출보다 금리가 높은 상품이다. 은행에서 밀려난 차주일수록 소득과 신용도가 낮을 가능성이 크고, 높은 이자는 다시 상환 부담을 키운다. 카드론 증가가 단순한 대출시장 확대가 아니라 취약차주의 금융비용 상승을 의미할 수 있는 이유다.
카드사 입장에서 카드론은 중요한 수익원이다. 가맹점 수수료율이 반복적으로 낮아지면서 신용판매만으로 충분한 이익을 내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카드사들은 카드론과 현금서비스에서 얻는 이자수익으로 결제사업의 낮은 수익성을 보완해 왔다. 대출 잔액이 늘어나면 이자수익도 증가하기 때문에 겉으로는 카드론 확대가 실적에 유리해 보인다. 그러나 실제 카드사 실적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25년 8개 전업 카드사의 당기순이익은 2조3,602억원으로 전년보다 2,308억원, 약 9% 감소했다. 카드 이용액과 대출자산은 늘었지만 가맹점 수수료 수익 감소와 자금 조달비용, 부실에 대비한 대손비용 증가가 이익을 깎았다.
카드사는 은행처럼 고객의 예금을 받아 대출하는 금융회사가 아니다. 카드론에 필요한 자금의 상당 부분을 카드채와 자산유동화증권 등을 발행해 마련한다. 시장금리가 상승하면 카드채 발행 비용이 커지고, 과거보다 비싼 이자를 주고 돈을 조달해야 한다. 차주에게 받는 대출이자가 늘어도 카드사의 조달비용이 함께 오르면 실제로 남는 이익은 크지 않다. 연체율 상승은 더 직접적인 부담이다. 카드론 고객이 빚을 갚지 못할 가능성이 커지면 카드사는 예상 손실에 대비해 대손충당금을 쌓아야 한다. 충당금은 실제 부실이 확정되기 전에도 비용으로 반영되기 때문에 순이익을 감소시킨다. 대출을 많이 취급해 이자수익이 늘어도 연체 위험이 빠르게 커지면 카드사의 이익은 오히려 줄어들 수 있다.
올해 1분기 일부 주요 카드사의 대손충당금도 큰 폭으로 증가했다. KB국민카드는 전년 동기보다 46.5% 늘어난 2,847억원, 현대카드는 38.6% 증가한 1,239억원, 신한카드는 13.8% 늘어난 2,557억원을 적립했다. 카드론 잔액 증가가 곧바로 카드사의 수익 증가로 연결되지 않는 이유가 이 수치에 나타난다. 금융당국이 카드론 증가를 예의주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카드론 잔액이 43조원을 넘어서자 카드사들은 금융당국에 잔액과 신규 취급 상황을 일일·주간 단위로 보고하기 시작했다. 일부 카드사는 대출비교 플랫폼에서 신용대출 상품 노출이나 신규 취급을 중단하며 속도 조절에 들어갔다.
카드론 규제를 강화하면 가계부채 증가 속도를 낮추는 효과는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은행과 카드사에서 모두 대출이 막힌 취약차주가 저축은행이나 대부업, 불법 사금융으로 이동할 가능성도 있다. 대출 공급을 줄이는 것만으로는 이미 생활비 부족과 기존 부채 상환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카드사 역시 선택이 쉽지 않다. 카드론을 계속 늘리면 당장의 이자수익은 확보할 수 있지만 연체와 부실 위험이 커진다. 반대로 대출을 빠르게 줄이면 가맹점 수수료 수익 감소를 보완해 온 핵심 수익원이 약해진다. 결제사업의 경쟁은 치열해지고 할인과 포인트 비용은 늘어나는 상황에서 새로운 수익원을 찾기도 어렵다.
이에 카드사들은 개인사업자 대출과 자동차 할부금융, 상업자표시신용카드, 데이터 사업 등으로 수익원을 넓히고 있다. 해외 채권과 자산유동화증권을 활용해 자금 조달처를 다변화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난다. 다만 개인사업자 대출 역시 경기가 악화하면 부실 위험이 커질 수 있어 카드론을 완전히 대체하기는 어렵다. 카드론 증가는 한 금융상품의 판매가 늘어난 현상을 넘어 국내 가계대출 시장의 이동을 보여준다. 은행이 위험을 줄이기 위해 대출 문턱을 높이자 자금 수요가 더 높은 금리의 제2금융권으로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가계는 더 많은 이자를 부담하고 카드사는 더 큰 부실 위험을 떠안게 됐다.
앞으로는 카드론 잔액뿐 아니라 대환대출과 연체율이 함께 상승하는지 살펴봐야 한다. 카드사의 대손비용과 카드채 조달금리도 중요한 지표다. 대환대출이 계속 늘어난다면 신규 대출이 소비나 투자보다 기존 부채를 돌려막는 데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일 수 있다. 카드론은 늘었는데 카드사가 덜 벌었다는 사실은 고금리 대출이 반드시 안정적인 수익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 대출시장에서 벌어지는 일은 돈을 빌리려는 사람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빌릴 수 있는 곳이 점점 더 비싸고 위험한 곳으로 이동하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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