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한 기업이 미국 AI 모델로 항공기 설계와 고객 데이터를 처리한다고 가정해보자. 어느 날 미국 정부가 국가안보를 이유로 해외 이용자의 접근을 막으라고 명령한다면, 계약이 남아 있어도 업무가 멈출 수 있다. 유럽이 두려워하는 ‘킬스위치’는 바로 이런 상황이다.
정말 미국산 AI 안에 원격으로 전원을 끄는 비밀 버튼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마르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16일 외교관들에게 보낸 전문도 “정부의 마법 버튼은 없다”며 킬스위치 주장은 과장됐다고 반박했다. 미국은 민감한 기술의 특정 사용을 잠시 멈추거나 출시 전 보안검사를 요구하는 것은 안전관리이지 기술 통제가 아니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유럽이 말하는 킬스위치는 기계 안에 숨은 장치가 아니다. 미국 정부가 수출통제와 제재를 통해 미국 기업에 해외 고객의 계정, API, 클라우드 서비스나 업데이트를 중단하도록 명령할 수 있는 법적·사업적 통제력을 뜻한다. AI가 인터넷으로 접속하는 서비스일수록 물리적인 스위치가 없어도 접근 권한 하나로 같은 결과가 생긴다.
논란은 지난 6월 현실이 됐다. 트럼프 행정부는 국가안보를 이유로 앤스로픽의 최첨단 모델 미토스와 페이블에 외국인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고, 회사는 전 세계 이용자의 접근을 갑자기 중단했다. 같은 달 제한은 해제됐지만 유럽이 받은 신호는 분명했다. 오늘 사용할 수 있는 핵심 AI가 내일도 제공된다는 보장은 없다는 것이다.
미국의 설명에도 일리는 있다. 고성능 AI가 대규모 해킹이나 사이버 공격에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면 정부가 모델 공개 범위와 시기를 통제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자국 기업의 거대한 인프라와 안전한 공급망이 동맹국에도 가장 효율적인 선택이라고 주장한다. 유럽이 모든 기술을 독자 개발하면 비용이 커지고 성능 격차가 벌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무시하기 어렵다.
문제는 AI가 단순한 문서작성 도구를 넘어 국방, 금융, 의료, 항공과 행정의 기반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기업이 특정 모델에 맞춰 데이터와 업무체계를 구축한 뒤 접근이 끊기면 다른 서비스로 갈아타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든다. 데이터 형식과 보안인증, 직원 교육까지 다시 맞춰야 하므로 대체 모델이 있다고 곧바로 정상화되는 것도 아니다.
유럽의 불안은 시장 구조에서 더 커진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에 따르면 역내 클라우드 시장의 70% 이상을 비EU 초대형 사업자 세 곳이 장악하고 있으며, 유럽 기업의 점유율은 15% 수준에 머물러 있다. AI 모델뿐 아니라 이를 돌리는 데이터센터와 클라우드까지 미국 기업에 의존하면 한 서비스의 문제가 산업 전체로 번질 수 있다.
EU가 6월 제안한 ‘클라우드·AI 개발법’은 이런 위험을 줄이려는 계획이다. EU는 앞으로 5~7년 안에 역내 데이터센터 용량을 최소 세 배로 늘리고, 공공부문이 사용하는 클라우드와 AI를 네 단계의 주권 수준으로 평가할 방침이다. 가장 높은 단계에는 소프트웨어 공급망을 직접 통제하고 제3국의 간섭을 받지 않는 조건이 포함된다.
기업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어버스는 민감한 산업·국방 업무의 클라우드 사업자로 프랑스 스케일웨이를 선택하고, 프랑스 AI 기업 미스트랄과 개발한 도구를 배치하기로 했다. 2028년 말까지 약 70개 핵심 애플리케이션을 옮기고, 향후 범위를 최대 900개로 확대할 수 있다는 계획이다. 에어버스가 검토한 조건에는 역외 법률과 킬스위치 위험으로부터의 보호도 포함됐다.
그렇다고 유럽이 미국 기술과 완전히 결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최첨단 AI에는 엔비디아 같은 미국 기업의 반도체와 방대한 자본, 전력이 필요하다. 유럽산 모델과 클라우드를 키우더라도 비용과 성능에서 미국 빅테크를 단기간에 따라잡기는 어렵다. 지나친 자국 우선주의는 서비스 가격을 높이고 혁신 속도를 늦출 가능성도 있다.
결국 유럽의 목표는 모든 것을 혼자 만드는 ‘기술 고립’보다 한 나라나 기업이 서비스를 끊어도 핵심 기능이 멈추지 않는 ‘선택권’에 가깝다. 중요한 데이터를 지역에 보관하고, 여러 클라우드와 AI 모델을 함께 사용하며, 필요할 때 다른 공급자로 옮길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이 변화는 한국에도 남의 일이 아니다. 한국 기업과 공공기관 역시 미국 AI와 클라우드를 빠르게 도입하고 있다. 성능과 가격만 비교할 것이 아니라 데이터가 어느 법의 적용을 받는지, 서비스 중단 시 업무를 얼마나 빨리 복구할 수 있는지, 다른 모델로 이전할 수 있는지도 계약 단계에서 확인해야 한다.
미국산 AI에 비밀 킬스위치가 있다는 주장은 정확하지 않다. 하지만 미국 정부가 법과 정책으로 접근을 차단할 수 있고, 실제로 해외 이용 제한이 발생했다는 점도 부정할 수 없다. 유럽이 서두르는 이유는 미국 기술이 나빠서가 아니라 너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AI 시대의 진짜 주권은 최고의 모델을 보유하는 것만이 아니라, 누군가 스위치를 내려도 멈추지 않을 대안을 갖는 데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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