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안은 아직 국회 문턱도 넘지 못했다. 그런데 은행들은 이미 판을 짜고 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둘러싼 진짜 싸움은 법안 통과 전부터 시작됐다.
정부는 올해 하반기 디지털자산기본법 입법을 추진한다고 밝혔다. 스테이블코인의 발행과 유통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핵심이다. 발행 인가제, 발행액만큼 준비자산을 쌓아야 하는 의무, 이용자가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 상환청구권까지 담길 예정이다. 다만 이 법안은 원래 올해 1분기 처리를 목표로 했지만 중동 지역 정세 불안, 6·3 지방선거, 국회 상임위 구성 지연이 겹치며 계속 밀려왔다. 지난 4월까지만 해도 법안심사소위 상정까지 검토됐지만, 같은 달 중동 사태가 터지면서 논의 자체가 멈췄다. 이후 지방선거 국면으로 넘어가면서 법안은 다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돈의 흐름을 보면 왜 은행들이 조급한지 답이 나온다. 발행 주체를 은행이 과반 지분을 가진 컨소시엄으로 제한할지가 최대 쟁점이다. 금융안정을 이유로 은행 중심 구조를 주장하는 목소리와, 핀테크·플랫폼 기업의 참여를 넓혀야 혁신이 산다는 반박이 팽팽하다. 법안 윤곽이 나오기도 전에 4대 은행이 컨소시엄을 먼저 구성하며 시장 주도권을 선점하려는 움직임이 뚜렷해진 배경이다. 법이 늦어질수록, 시장은 법보다 앞서 나간다.
은행권의 움직임은 구체적이다. 4대 시중은행은 이미 각각 별도의 컨소시엄 구성을 검토하며 발행 인프라와 준비자산 운용 방식을 놓고 내부 검토를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법안이 통과되는 순간 곧바로 인가 신청에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를 끝내두려는 전략이다. 반면 핀테크·플랫폼 업계는 발행 주체 요건에서 은행 지분 요건이 과반으로 정해질 경우, 사실상 참여 자체가 막힐 수 있다는 우려를 국회와 금융위에 지속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은행권 내부에서도 입장이 완전히 같지는 않다. 대형 은행은 컨소시엄 주도권을 자신하는 반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은행들은 대형사 중심 구도에서 밀려날 수 있다는 걱정을 내비치고 있다.
핀테크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B씨는 상황이 답답하다. 결제 인프라는 이미 준비돼 있지만, 발행 주체 자격 자체가 은행으로 좁혀질 경우 시장 진입 기회를 원천적으로 잃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B씨의 회사는 지난 1년간 소상공인 결제망에 스테이블코인 기반 정산 시스템을 시범 적용해왔는데, 법안이 은행 중심으로 확정되면 지금까지의 투자가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B씨 같은 중소 핀테크 입장에서는 법안의 세부 조항 하나하나가 사업의 존폐를 가르는 문제다.
반대편에 있는 은행권 관계자의 시각은 다르다. 준비자산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이용자의 상환청구권을 실제로 보장하려면, 자본 건전성이 검증된 금융기관이 발행 주체가 되는 게 맞는다는 논리다. 스테이블코인이 대규모로 유통된 뒤 발행사가 부실화되면 그 피해가 고스란히 이용자에게 돌아간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결국 이 논쟁은 혁신성과 안정성 가운데 무엇을 우선할지에 대한 근본적인 시각 차이에서 비롯된다.
해외 사례를 참고하는 목소리도 있다. 미국은 상원에서 발의된 관련 법안을 통해 스테이블코인 시장에 명확한 규제 체계를 마련하려는 흐름을 보이고 있는데, 초당적 지지를 바탕으로 입법 속도가 붙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 금융당국도 이런 해외 규제 동향을 참고해 원화 스테이블코인 제도화 방향을 잡겠다는 입장이지만, 한국은 은행 산업 보호라는 별도의 정책 목표까지 함께 고려해야 하는 만큼 미국식 모델을 그대로 가져오기는 쉽지 않다는 지적도 나온다.
투자자 입장에서도 이 논쟁은 남의 일이 아니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은행 컨소시엄 중심으로 출범하면 초기에는 안정성이 높은 대신 서비스 종류가 제한적일 가능성이 크고, 핀테크 참여가 넓어지면 결제·송금 서비스는 다양해지는 대신 초기 신뢰 구축에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나든 소비자가 실제로 체감하는 수수료, 환전 편의성, 사용처는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앞으로 지켜봐야 할 건 크게 세 가지다. 첫째, 발행 주체 자격을 은행에 국한할지 아니면 핀테크에도 문을 열지다. 둘째, 국경을 넘는 스테이블코인 거래를 외국환거래법 체계 안에서 어떻게 규율할지다. 셋째, 전자금융거래법과 특정금융정보법 개정이 기본법과 함께 처리될 수 있을지다. 이 세 가지가 어떻게 정리되느냐에 따라 원화 스테이블코인 시장의 초기 주도권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여기에 비트코인 등 디지털자산 현물 ETF 도입을 위한 자본시장법 개정도 함께 추진되고 있어, 연내 국회 통과 여부가 디지털자산 업계 전체의 판도를 바꿀 수 있다. 국회 정무위원회 구성이 마무리되는 대로 법안 논의가 다시 속도를 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지만, 발행 주체를 둘러싼 이해관계가 워낙 첨예해 연내 처리를 낙관하기는 아직 이르다.
더불어민주당은 국회에 발의된 디지털자산 관련 법안들의 통합 작업을 마치고 하반기 중점 법안으로 처리한다는 방침을 밝힌 상태다. 다만 발행 주체와 가상자산거래소 지분 규제 등 핵심 쟁점이 조율되지 않으면 법안 자체가 다시 해를 넘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지금으로서는 국회 일정과 함께 금융위원회가 내놓을 세부 시행령 초안을 함께 확인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대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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